10주년 특별페이지
나의 삶, 나의 자립 ⑯ 행복, 진행 중
안녕하세요. 저는 26년 정도의 장애인 생활시설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자립생활 체험홈에서 자립생활을 준비 중인 박준효 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살아왔던 삶을 한 번 돌아보고 제가 자립을 하게 된 과정까지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가족 ]
저는 뇌병변 장애인입니다. 아주 어릴 적 감기(고열)를 심하게 앓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저를 낫게 하고자 침을 맞히러 다니곤 했었는데 그 때문인지 장애가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기억나는 가족은 할머니와 누나, 이모와 이모부, 고모와 고모부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다 연락이 되지 않지만 가족들이 모이 던 때를 생각해 보면 제가 이모, 고모 이렇게 부르던 사람들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저와 가족들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구에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유독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할머니에겐 떼를 많이 쓰고 투정도 부렸습니다. 김치를 유난히 좋아 하는 저는 김치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겠다 투정 부리고 일부러 못되게 굴고 했었습니다. 할머니가 제 글을 볼 수 있다면 이제라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시설에서의 삶... ]
시설에 언제 맡겨졌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추해 보았을 때 6-7살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모로부터 시설에 보내졌다고 합니다. 시설로 보내지기 전에 장애를 낫게 해주고 치료를 잘한다는 기도원에서 약 2박3일 지내면서 치료를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 시설로 보내졌고 탈시설을 하기 전까지 계속 같은 시설에서 지내왔습니다.
시설로 막 보내졌을 당시 시설에서의 기억은 끔찍하기만 합니다. 할머니와 이모는 저를 보러 가끔 시설로 찾아오곤 했습니다. 할머니와 이모가 찾아올 때면 “시설 생활은 어떤지, 밥은 많이 주는지, 선생님들은 잘 해 주시는지?” 물어보시곤 했고 그럴 때면 “잘해 주신다. 밥도 잘 나오고 좋다”고 얘기 했었습니다. 허나 걱정이 되는지 계속 되묻곤 했고 선생님이 계실 때엔 같이 있는 자리에서 자꾸 꼬치꼬치 캐묻고 귀찮기도 해서 대충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실수였던 것 같습니다. 뭘 잘 못했는지 알 길이 없으나 그 선생님은 가족들이 다녀간 이후론 저를 한쪽 구석에 몰아놓고 가족들이 가져오거나 사다준 음식을 주시면서 “애들한테는 주기 싫으니 네가 다 먹어라” 하셨습니다. 저를 신경써주고 생각해서 많이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닌 “혼자 다 처먹으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수도 호스로 맞은 적도 있고 밥을 굶기거나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거기서 잠을 자라고 한다거나 실제로 물을 받은 욕조에 한참을 넣어둔다거나 오줌을 쌌다고 화장실에서 재운적도 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바지에 똥, 오줌을 싸도 혼내지 않는데 유독 저에게만 그렇게 대하신 것 같습니다. 벌도 많이 받았는데 누워서 벽을 보고 있게 하거나 다리를 한참 동안 들고 있게 했습니다. 그게 시설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의 기억이니 7-8살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한참을 괴롭히고 구박하다가도 가족들이 올 때는 더 이상 괴롭힘이나 구박을 당하기 싫어 아프지 않은 척, 잘해주시고 잘 지내는 척 연기를 해야 했었고 선생님들의 기분을 맞춰 주어야 했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어디론가 가시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었지만 어린 시절, 제겐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며 기억 입니다.
어느 날 할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이모가 저를 맡길 때 잠시 맡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 맡길 줄 몰랐다며 미안해 하셨습니다. 그 모습이 마지막 이었고 생사여부를 확인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나가 찾아 왔었는데 다른 말은 없고 이모가 찾아 왔는지, 연락처를 아는지 물어봤고 그게 마지막 이었습니다.
[목마른 배움, 고마운 인연]
남들 다 가는 학교 한 번 가보지 못했습니다. 학교는 커녕 공부도 하지 못했고 청소년기의 나이가 되어서야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오시는 분들을 통해 한글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6살 정도에 처음으로 특수학교 선생님이 시설로 찾아와서 공부를 가르쳐 주는 순회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허나 그 공부라는 수준도 대충 가르쳐 주는 것 정도였습니다. 봉사활동을 온 분들이 숙제를 내주면 혼자 열심히 하려 했고 늘 구구단을 외우곤 했습니다. 저는 항상 배움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제가 20~21살 정도에 교회에서 봉사활동을 오시는 분 중 한 분이 저에게 많은 관심을 가져 주시고 잘 대해 주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를 못살게 굴던 선생님이 있었다면 이 분은 제게 천사 같은 분이 셨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고 부탁을 드렸는데 딸 두 명을 제게 소개 시켜주셨고 그 분의 딸들을 통해서 기초적인 계산 방법이나 한글을 읽고 쓰는 법을 어느 정도 익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관심을 많이 가져주시곤 하니 자신밖에 몰랐던 제가 많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딸 두 명 밖에 없고 아들이 없으니 “양 아들 하자”하여 지금은 “어머니”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 분들의 도움으로 제대로 공부해서 검정고시를 치르고자 하였으나 순회교육을 통해 졸업을 하고 학력이 있으니 검정고시는 치르지 못했습니다.
[자립을 꿈꾸다.]
꿈이 있다 해도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 답답했습니다. 마냥 생각했던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만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양어머니가 “너도 혼자 살 수 있을 거다”라는 이야기를 종종 해주었고 그 때부터 조금씩 시설 밖의 삶을 생각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난 해 시설 선생님들이 자립생활을 하고 싶은지 물어봐 왔습니다. 그렇다고 하니 자립생활 관련 책자를 주었고 거기에 있던 번호로 전화를 해볼까? 말까? 고민을 하던 중에 자립생활 캠프라는 것을 알게 되어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캠프를 가서 보았던 세상은 모든 게 다 신기했습니다. 가고 싶은 곳을 결정하고, 먹고 싶은 메뉴를 선택한다는 것과 처음으로 내 돈을 지불하고 사먹을 수 있다는 게 제겐 완전 신선한 충격 이었습니다. 옷이나 필요한 물건 그리고 선물로 사갈 물건을 살 때에 친절하게 맞이해 주고 이 것 저 것 추천을 해주시는데 손님으로 인정받고 대우 받는 다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냥 다 좋았습니다. 시설로 돌아가는 순간에도 그 맛(느낌)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단기체험에서부터 준비해 보기로 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결정을 했습니다. 물론 단기체험을 하면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지, 제 장애상태의 어떤 면에 있어 늘 신경 쓰이고 걱정 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을 시설의 선생님들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 걱정 하셨지만 체험홈의 선생님들은 어렵게 풀어 놓았을 때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단기체험을 하다 보니 그 동안 내가 꾸었던 꿈 또한 현실과 참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기체험을 끝내고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시설이 아닌 바깥세상에서 살아 갈 수 있구나 하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빨리 나가고 싶어 체험홈 선생님에게 계속 연락을 했습니다. 그렇게 지금은 자립생활 체험홈에서 지역사회로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고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만 전동 휠체어를 구입을 하고 누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어디로 가자고 부탁하지 않아도 이제는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습니다. 질라라비 장애인 야학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렇게 목말라 하던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성의 감정으로 좋아해 주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내편이 생겼구나,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이야기도 들어 주고 나눠줄 수 있는 사람, 무엇보다 날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행복합니다.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감정인 것 같습니다.
자립을 준비하며 한 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겪게 되는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관계라는 것이 참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저는 잘 해나갈 거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어 봅니다. 저는 지금이 너무 행복합니다.
2014년 가을,
박준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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