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주년] 2005년부터 변화를 이끌어 온 20년
노금호(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이사장)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벌써 20년을 맞았습니다. 언제, 어떤 계기로 창립하게 되셨나요?
사실 처음부터 자립생활센터를 설립하자는 목표로 시작한 건 아니었어요. 대학생 때부터 해오던 장애인권운동을 담아낼 그릇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단체에 들어갈까, 야학을 할까 고민하다가, 대구에는 진보적 장애인 운동을 지향하는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센터를 만들게 됐어요.
대학생 시절에 자립생활 운동을 잘 알고 계셨나요?
자세히 알지는 못했어요. 동료상담이나 IL센터(자립생활센터)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사업이나 조직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건 몰랐어요. 당시엔 IL센터들이 정부 지침 없이 시민단체처럼 운영되던 시절이라 더 그랬던 것 같아요.
2005년 설립 당시에는 어떤 활동을 하셨어요?
지역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준비 회의를 했어요. 처음엔 대학 동아리 후배들, 졸업생까지 해서 6~7명 정도였고, 결국 남은 건 저와 김봉조 이사뿐이었어요. 결국 두 명이서 회원 겸 활동가로 꾸려갔죠. 장애인의 날 행사(장애인차별철폐의 날)를 처음으로 집회 형식으로 열기도 했고, 지역의 중증장애인들을 찾아다니며 만나러 다니는 게 주요 활동이었어요. 박경석 대표(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님이 활동 기반 자금을 마련해주셨고, 김봉조 이사님의 기초생활수급비를 합쳐서 생활비와 운영비를 충당했어요.
센터 활동이 확산된 계기는 2006년 활동보조서비스(현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운동이었죠?
당시 저와 주요 활동가들이 모두 중증장애인이었어요. 일상생활을 하려면 24시간 지원이 필요했지만, 현실은 너무 열악했죠. 비장애인 활동가의 활동 지원이 없을 때는 여관방에서 김봉조 이사와 함께 살면서 페트병에 소변을 보기도 했어요. 절박했죠. 그러다가 서울의 활동보조 제도화 투쟁을 보며 '이건 대구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5월 18일 아무 준비 없이 농성을 시작했죠. 침낭도 없이, 그냥 판을 펼친 거였어요. 진짜 아무 준비가 없었어요. 농성하면 기본적으로 침낭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없었어요. 서울지역 동지들한테 빌려 달라고 손 벌리면서 버텼죠. 제가 집행위원장을 맡겠다 선언하고, 2006년 5월 18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구시청에서 농성을 했어요. 약 1억 5천만 원 규모의 예산을 대구시가 반영하기로 합의했고, 중증장애인을 대상으로 활동지원서비스를 시범사업을 실시한다는 합의로 농성을 종료했어요.
이후 바로 활동보조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나요?
저는 못 받았고, 김봉조 이사님만 받았어요. 당시 요구는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전액 정부 지원”이었지만, 실제로는 차상위 계층 중심, 월 180시간 수준이었죠. 부양의무제 때문에 저는 배제됐어요.
2007년 정부 차원의 활동보조서비스 제도 도입이 이뤄졌어요. 센터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처음 2년은 제도 참여를 못했어요. 안하기도 했고요. 기관 등록도 안 됐고, 정부 예산을 받으면 운동이 통제될 수 있다는 고민도 있었죠. 당시에는 변혁운동의 지향이 강했거든요. 동시에 ‘투쟁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정부 예산 받으면서 물러서면 누가 따르겠나’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우선 회원을 늘리고, 투쟁에 함께할 사람을 모으는 데 집중했어요. 주거권 운동, 이주노동자 운동 같은 더 소외된 운동에 적극적으로 연대했죠. 큰 단체보다 오히려 작은 조직과 함께하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2008년에서야 활동보조서비스 중개기관으로 참여하게 됐어요.
활동보조서비스 중개기관으로 지정되면서 변화가 있었나요?
당사자들의 삶이 달라졌고, 투쟁판에도 더 많이 참여하게 됐어요. 동시에 자립생활주택 지원사업도 시작했어요. 체험홈(현 자립생활주택)은 혼자 살아본 경험이 없는 분들이 자립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꼭 필요했어요. 많은 분들이 가족에게 예속된 삶을 살고 있었거든요. 활동지원서비스를 받으면서 외출이 가능해지고, 다른 사람과 경험을 나누면서 '아, 나도 이렇게 살 수 있구나' 하는 의지가 생겼죠. 그런데 주거가 없으면 그 다음이 불가능하죠. 체험홈은 그런 자립의 첫 단계를 위한 공간이었어요. 제도권 내에서의 활동 덕분에 공간을 확보하고, 구체적 요구를 할 근거를 더 마련할 수 있게 됐어요.
2011년 이후, 탈시설 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저는 어릴 때 시설에서 생활했던 적이 있어요. 또 실태조사를 통해 (시설의) 학대와 인권침해 현실을 봤어요. 자립생활과 사회통합을 위해선 탈시설이 필수였죠. 그래서 201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탈시설 투쟁을 전개하게 됐어요. 활동지원, 자립주택, 이동권 같은 기초적인 기반이 쌓이고 나서는 탈시설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됐어요. 탈시설은 자립생활운동의 본질적 과제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대구시립희망원 폐쇄 과정도 큰 계기가 됐죠?
많은 당사자들이 저희에겐 스승 같았어요. 중증.중복 발달장애인인 희망원 거주인들이 탈시설하는 과정은 “지원만 있으면 (자립생활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죠. 물론 비용 문제로 반대도 많았어요. 솔직히 내부에서도 안전 문제 때문에 고민이 컸어요. 저도 대표로서 반대편의 논리를 일부러 제기하고 토론을 부추기기도 했어요. 하지만 활동가들이 “원칙을 지켜야 한다”라고 단호히 얘기했어요. 결국 제도를 찾아내고, 야간 순회서비스 같은 걸 활용해 24시간 지원 공백을 메웠어요. 그게 큰 전환점이 됐죠. 결국 중증.중복 발달장애인이라고 불리는 최중증 장애인 9명이 지역사회로 나올 수 있었어요. 초기엔 힘들었지만 24시간 지원 체계를 요구하고 만들어 나가며 안정적인 기반을 갖출 수 있었어요.
지역사회의 발달장애인 지원도 시작했는데, 계기가 있었나요?
긴급출동 SOS 사건을 통해 피해 당사자를 지원하면서 발달장애인을 만나게 됐어요. 처음엔 솔직히 엄두가 안 났어요. 신체장애 중심으로만 활동하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지원체계랄 것도 없었어요. 실패할 수도 있었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변화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다른 기관(그룹홈)에 모셨지만 제대로 지원이 안 됐어요. 결국 사람센터의 자립생활주택에서 지원하기로 결정했어요. 이후 자신의 집을 구해 생활해 나가셨죠. 그 경험이 발달장애인도 충분히 자립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고, 본격적으로 발달장애인의 자립지원을 위한 사업을 하게 됐어요.
코로나19 시기를 돌이켜본다면요?
정말 지우고 싶은 시간이었어요. 사람센터가 전국 최초로 확진자가 접촉한 장애인 기관이 됐어요. 내부 격리와 혼란이 컸죠. 당시 센터를 이용했던 당사자들이 자가격리에 들어가야 했지만 활동지원사들도 당시 동반격리를 선뜻 나서지 못하는 조건이었어요. 상근자들이 대신 들어가기로 했죠. 모두 두려움이 컸죠. 조직의 리더로서 “국장, 팀장까지 들어가면 조직이 마비된다. 우선 팀원들에게 자율적으로 맡기자”고 했어요. 언론과 사회의 냉정한 태도도 충격이었어요. 저희는 장애인 자가격리 및 확진자를 위한 대책을 호소했는데, 언론은 자극적으로만 보도했어요. 때로는 “대구라서 그렇다”는 식으로 몰아가기도 했고, 지방정부는 비용 문제만 이야기했어요. 결국 취약계층은 가둬두고 배제하는 식으로 밖에 대응하지 않는다는 냉정함에 우울했죠. 그럼에도 버텨낸 건 함께 고통을 분담한 활동가들 덕분이었어요.
이제 20년을 맞았습니다. 앞으로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활동 방향을 말씀해주세요.
매년 재정 걱정이 있고, 활동가들은 늘 과중한 업무 속에 있어요. 그렇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중요한 건 장애인의 자기결정권과 주체적 삶을 보장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 원칙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앞으로는 탈시설 정책의 제도화와 발달장애인 당사자의 주체화가 가장 중요한 과제에요. 탈시설은 단순히 시설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지역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거잖아요. 주거, 활동지원, 이동권이 다 연결되어야 하죠. 발달장애인 역시 적절한 지원이 있으면 충분히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 그 과정을 지원하고 싶어요. 사람센터가 단순히 ‘장애인 기관’이 아니라, 연대와 변화의 거점이 되길 바래요. 사람센터가 장애인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여성, 청년 등 더 많은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곳, 또 당사자 스스로가 사회 변화를 이끌어가는 주체로 서는 공간이 되는 게 제 바람이에요.